숫자 ‘18’은 이중적이다. ‘열여덟 살’이라고 읽는 것과 ‘18세’라고 읽는 것은 느낌 자체가 다르다. ‘열여덟 살’과 달리 ‘18세’에는 묘한 불온성마저 감돈다. ‘열여덟 살이 이야기하는 열여덟 살’을 이번 호 커버스토리 주제로 잡으면서 <대나무>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무엇이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가? 반대로 무엇이 당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가? 서울 압구정고등학교 진로교육부장으로 있는 박재현 교사의 도움을 받아 이 학교 1·2학년에 재학 중인 남녀 학생 184명(남학생 77명, 여학생 107명)에게 물었다. 예상 외로 답변이 다양했지만 그래도 도드라져 보이는 하나의 경향은 뚜렷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한국의 고등학생들 머릿속은 온통 공부, 대학 입시, 시험 성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을 자유롭게 적게 했더니 34.0%의 학생이 ‘공부’에 대한 압박감과 스트레스라고 답했다. ‘시험’이나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라고 답한 학생도 16.5%나 됐다. ‘공부’나 ‘시험’, ‘성적’이 짜증난다는 학생의 비율이 절반을 약간 넘는다.

부천 원미고등학교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도 권새봄(3학년) 양은 “우리 입시제도는 무조건 국영수 중심으로 공부만 잘하라는 식”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여지없이 확인된 셈이다. 심지어 한 압구정고 학생은 ‘나의 꿈을 방해하는 한국의 독특한 교육방식’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엄마나 부모님의 잔소리가 짜증난다는 학생도 11.0%나 됐다. 엄마나 부모님의 잔소리를 공부나 시험 성적, 대학 진학에 대한 압박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포함하면 주관식 문항이었는데도 ‘공부’나 ‘시험’ 스트레스를 짜증의 인으로 꼽은 학생이 61.5%나 됐다. 4.4%의 학생은 진로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했다. ‘친구’(6.6%)나 ‘선생님’(3.3%) 때문에 짜증난다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경향은 ‘고등학생이어서 싫은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짜증과 마찬가지로 역시 ‘공부’라고 응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다. 33.6%의 학생이 공부에 대한 압박감, 늘어난 학습량을 꼽았다. 전교 10등 안에 든다는 한 2학년 남학생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너무 공부로만 몰아붙인다. 세상에는 공부 외에도 성공할 방법이 많다”고 적었다. ‘공부해야 해서’ 싫다고 밝힌 또 다른 2학년 남학생은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사는지 맞는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삶에 회의를 느낀다”고 말했다.

2위는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감이다. 18.0%의 학생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과 입시 준비를 적었다. 대입에 대한 압박감은 세 번째로 많이 답한 문항과도 연결된다. 고등학생이어서 싫은 것으로 9.0%의 학생은 ‘수능’이라고 답했다. ‘시험’이나 ‘성적’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현실이 싫다는 학생도 7.1%였다. 무려 70%에 가까운 학생이 대학 입시 때문에 고등학생인 게 싫다고 답한 셈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공부 빼고 다 좋다’고 적은 학생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짜증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로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적은 학생도 4.7%였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의 잔소리(1.9%), 어린애 취급하고, 어리다고 내 말을 안 듣고 무시((2.4%)하거나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 때문에 고등학생인 게 싫다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숨 돌릴 틈 없는 환경’, ‘고등학교 시간표에 갇혀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고등학생인 게 싫다는 학생도 있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나 선생님, 주위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한 언론이 서울 주요대학 입학생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참고할 만하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신뢰가 담긴 따듯한 말 한 마디였다. ‘부모님에게 받은 도움 중 가장 유익했던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100명 가운데 53명이 ‘심리적 안정에 좋은 격려나 칭찬을 받는 게 유익했다’고 답했다. ‘체력 보충용 보양식·약품 제공’이라고 답한 학생도 28명이었다.

권형진 기자 jinny@daenamu.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