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7일은 내가 대입 수능시험을 본 날이다. 대한민국 청소년 시기는 수능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어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어둑한 저녁 무렵이지만 영영 올 것 같지 않았던 긴 수능 터널을 빠져 나온 날이다. 그런데 후련함보다는 정지된 화면처럼 먹먹했던 그 날 저녁 하늘이 생각난다.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여유라는 것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게으름도 피워 보고, ‘수능 끝나고 할 일’ 버킷리스트를 적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리스트를 적을 때에는 하루하루가 새로울 것 같은 기대로 즐겁기도 했지만 막상 입시라는 큰 산을 넘어서 만난 3개월은 기대만큼 설렘의 연속은 아니었다. 오히려 슬로모션처럼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2016학년도 수능을 끝낸 수험생도 2년 전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리고 아직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할 지 서성이고 있는 예비 대학생이라면 나의 이야기가 작은 다독거림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생활이 각진 틀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시간이었다면 대학 새내기의 3월은 계절만큼이나 생동감 넘치는 도전의 시간이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기회들이 항상 쏟아질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디서 찾아야 할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대학 새내기에게 대학 캠퍼스는 기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회에 손을 뻗을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손을 뻗어서 기회를 잡고 나의 것을 만들 수 있는 용기는 지금 대학생활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것을 배웠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앞으로 채워나갈 ‘그릇 만들기’ 이다. 나는 ‘버킷리스트 그릇 만들기’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이 시기에  담아 둘 그릇을 만들어 뒀다면 그 기회들은 온전하게 나의 것이 되겠지만 그릇이 없다면 그 기회는 여전히 ‘나중에 꼭 실천할 일’ 리스트에 적힌 소망으로 남을 뿐이다.

학교생활의 기본계획은 지금 짜둬야

나의 예비 대학생 시절을 생각해 볼 때, 가장 아쉬운 점은 ‘버킷리스트 그릇 만들기’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 수능 이후 여유는 나태로 변질되고 오늘 당장 시작할 일보다는 내일부터 해도 괜찮은 일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하루 이틀 비슷하게 보낸 일상은 봄 눈 녹듯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대부분의 우리의 학창시절이 그렇듯, 유치원 때, 많은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지만 입시에 매몰돼 허덕이면서 취미로 피아노를 칠 만큼 한가한 아이도 없었다.

나 역시 그랬고 나의 수능 이후 버킷리스트 목록에는 피아노 연주가 있었다. 거창한 목표는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하고 싶은 것이기에 쉽게 실천하리라 믿었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피아노 연주는 여전히 ‘나중에 꼭 실천할 일’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대학 입학 후 동아리를 기웃거리던 나는 오케스트라 동아리 모집 홍보를 봤을 때 망설였고 ‘내가 그 때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면’ 하는 생각에 한 참이나 아쉬웠다. 악기를 배우겠다는 목표를 실천하고 ‘악기 배우기’라는 그릇을 만들고 시작했다면 오케스트라 단원 모집의 기회를 보았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선택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나의 그릇을 채워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에 와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이와 비슷한 경험은 친구들도 모두 한 번씩 겪어보는 후회라고 이야기한다.

그 중 한 친구는 고3 겨울방학 때의 짧은 경험을 잘 살려서 대학생활 그릇 만들기에 성공했다. 영화와 문화행사에 관심이 많았던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방학 동안 영화제에 직접 참석해보는 것이 목표라고 했었고 실제로 작은 독립영화제에 참석하게 됐다. 단순히 관객으로서 참여한 것이었지만 그 친구가 그곳에서 느낀 것은 이후 대학생활에서 많은 문화적 체험을 쌓아가게 한 기반이 됐다고 한다.

영화제에서 만난 사람들과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됐고 대중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리고 그 경험이 이제는 그 친구 인생에서 가장 큰 그릇이 됐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해 1월에 영화제에 용기내서 참석했던 것이 지금의 자신의 삶의 원동력을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처음에 그릇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도전의식이 아니다. 내가 해보려고 했던 것을 한 번이라도 실천해보고 그 안에서 직접 체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그릇을 넓혀가고 채워가는 것은 대학생활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서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그릇을 만들어가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도 없고 원하는 대로, 가능한 다양하게 채워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전공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목표했던 것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전공에 대한 뚜렷한 목표 없이 지원하게 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또 희망 전공은 정해져있더라도 구체적인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로의 방향은 대학 입학 후에 하나씩 배워가면서 결정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계획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전공에서는 무엇을 배우게 되고, 어떤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혹은 언제쯤 교환학생을 신청하게 되고 복수전공 하고 싶다면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지 등 기본적인 학교생활의 가이드라인을 숙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학교 3학년을 앞둔 지금, 나 역시도 학기마다 진로 계획을 위한 선택의 고민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수정해 가는 중이다. 전공은 고등학생 때부터 목표였던 심리학과에 진학해 전공 선택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선택의 고민과 실천의 망설임은 끊임없는 진행형이다. 무슨 동아리에 들어갈까 하는 즐거운 고민부터 어떤 강의를 신청할 지에 대한 머리 아픈 고민까지, 학교생활을 직접 계획해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낯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 때 미리 대학생활과 진로에 대한 그림을 그려두었다면 모든 갈림길에서 선택이 조금 더 쉬워질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계획은 구체적일 필요도 없고 또 앞으로 수없이 수정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완벽히 짜인 계획을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단지 대학생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 해보고 싶은 활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풍성한 대학생활이 될 것이다.

그때 첫걸음 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국제 교환학생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나의 대학 생활 버킷리스트에 있는 목록이기에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비록 피아노 배우기는 실패했지만 교환학생 준비는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다. 다행히도 지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영어 공부에 매진한 끝에 공인인증 영어 성적을 얻어서 다음 달이면 어느 나라로 갈 수 있는 지 결정된다. 이렇게 교환학생 준비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고3 겨울방학 때부터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계획을 세워 본 경험이 자신감을 주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언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연했지만 ‘교환 학생에 대한 목표’를 버킷리스트 목록에만 두지 않고 꺼내서 만지고 꾸미는 작은 실천이 보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나를 이끌었다. 심리학 전공을 생각하며 독일이라는 나라를 생각하고 그래서 처음 접하는 언어지만 독일어를 수강했다. 그 이후 교수님의 초대로 독일 교환 학생 친구들과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비록 시작은 막연했지만 이제 교환 학생은 꿈이 아니라 내가 이뤄 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 됐다. 교환학생에 대한 꿈을 단순히 소망으로만 남겨두고 그 첫 걸음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2학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신청해야할지 고민만 하다가 준비할 수 있던 시간과 기회들을 모두 날려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첫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 행동들이 쌓여서 더 뚜렷한 목표를 만들어줬고,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쳐지나갈 수 있는 활동들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기회로 잡을 수 있었다.

교환학생 준비에 대한 내용은 단순히 내가 겪었던 일을 소개한 사례지만 앞으로 대학생활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만큼,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만큼 목표는 성큼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차이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감하듯이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2년간의 생활을 보낸 지금, 나와 동기들은 자유보다는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더 크게 느낀다고 입 모아 말한다.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자유는 방임과 같다는 말처럼, 3개월 동안 ‘준비된 대학생’이 돼서 자신의 소중한 대학생활의 자유를 알차게 보낼 수 있길 바란다.

이은주 이화여대 심리학과 2학년

수원 영복여고를 졸업하고 2014년 수시로 이화여대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