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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수양개유적 발굴해 세계에 알려 … '성실·끈기·노력' 미개척 고고학 분야 외길 이끌었다.
선사시대 연구에 평생 쏟은 이융조 충북대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2016년 08월 03일 (수) 11:04:13 최익현 기자 bukhak@daenamu.kr

가 건네준 명함에는 세 가지 직함이 표기돼 있었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충북대 명예교수, 그리고 아시아구석기학회 명예회장. 셋 모두 그가 평생 걸어 온 길과 이어져 있는 곳이다.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75세)이다.

충북대 박물관과 그가 현재 이사장으로 몸담고 있는 한국선사문화연구원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오전 11시 반부터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5시, 창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에야 마무리됐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열정이 뿜어져 나올까.

   

이융조 이사장(충북대 명예교수)은?
1941년 서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박물관 수석연구원을 거쳐 충북대 교수로 30년 4개월 지냈다. 충북대 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고대학회, 한국구석기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아시아구석기학회 명예회장으로 있다. 특히 한국 구석기연구의 개척과 연구조사에 공헌하고, 세계고고고학 발달에 기여한 공로로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명예고고학박사, 영예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단양 수양개 유적과 고양 가와지볍씨 발굴 등에 깊이 관여했다. 구석기 용어의 우리말 사전화작업의 기초를 만드는 데도 중추역할을 했으며, 국제학술회의‘수양개와 그 이웃들’을 조직해 한국 구석기학을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51개 유적을 조사, 400여 편의 논문과, 각기 40여 권의 발굴보고서와 편저서로 국내외 학계에 보고 했다. 2016년 3월 제22회 용재학술상을 수상했다.


청주고속터미널을 빠져나와 충북대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박물관 입구에 전시돼 있는‘용곡인’동상 앞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이‘용곡 7호 사람’의 손에는 단양 수양개에서 발굴한‘주먹도끼’가 들려 있었고, 머리 모습은 북한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 인골에서 가져온 형태의 입상이었다. 이융조 이사장은 단양 수양개의 주먹도끼와 북에서 발굴한 두상을 결합한 방식의 동상을 세운 것을 가리켜 고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시도한 융합적 남북통일 염원이라고 설명했다.

1941년 충북 서산에서 태어난 이융조 이사장에게는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생 선택지가 몇 개 있었다. 하나는 농부였던 아버지의 꿈을 이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천주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자기 의지의 길이 있었다.

학부에서부터 연세대 대학원 3학기까지 홍이섭 교수지도로 한국천주교회사를 공부하던 그에게 어느 날 운명의 선택이 찾아왔다. “1965년 석장리 2차 발굴에 참여한 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줬던 거 같아요. 1차에 참여했던 대학원생들이 저마다 다른 사정으로 모두 불참했는데, 저만 2차 발굴 현장에 내려갔어요. 학과 일로‘급상경’전문을 받고 서울로 떠나는 저에게 손보기 교수님이‘박물관에서 구석기를 공부하자’는 권유를 하셨던 겁니다.”

천주교회사 연구와 구석기 연구 사이에서

학과에 전화기 하나만 달랑 있던 시절이었다. 교수들을 찾는 학과 전화는 조교 손을 거쳐 전해지던 무렵이었다. 연세대 사학과 조교였던 그가 멀리 공주 석장리 발굴현장에 내려와 있었으니, 학과 교수들은 다급했던 모양이다. 1964년 11월에 시작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조사에 참가하며 유적 조사와 깊은 인연을 쌓아가던 그는, 학과장의‘급 상경’요청에 의해 발굴 현장을 떠나게 됐지만, 농사꾼의 아들‘이융조’는 손보기 교수의 눈에 들고 말았다.

이게 그의 운명을 뒤바꾸고 말았다. “갈등을 참 많이 했어요. 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자 홍이섭 교수님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터라, 갑작스런 손보기 교수님 제의에 사실 어찌해야 할지 몰랐어요. 결심을 하고 홍 교수님을 찾아뵈니‘어느 분야라도 같은 한국사니 괜찮다. 그러나 반드시 그 방면에 큰 학자가 돼야만 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큰 학자가 돼야만 한다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죠. 그렇게 구석기와 인연이 시작된 겁니다.”

이후 이융조 이사장은 조교 임기를 마치고 1965년 9월 박물관에 임시직으로 첫 출근을 시작해 1976년 10월 퇴임할 때까지 만 11년을 연세대 박물관에서 생활했다. 말이 박물관이지 지금의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척박한 박물관이었다. 강의실 하나 정도로 서둘러 박물관을 열었던 게 1965년 3월 15일의 일이다. 그리고 10년 이 흘러서야 온전한 단독건물을 확보해 처음으로 구석기 전문 박물관의 격을 갖출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융조 이사장은 평생의 스승 손보기 교수에게서 삶과 연구의 자세를 배웠다. 이러한 자세는 연세대 박물관에서 충북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 더욱 확고해졌다. 1976년 11월 그는 충북대 박물관 주임교수로 청주 생활을 시작했다.

이융조 이사장이 연세대 박물관 일을 볼 때, 관장은 손보기 교수였다. 그는 손보기 교수와 함께 석장리 10차까지의 조사(1964~1974)를 끝내고, 다시 제천 점말 용굴 1~3차조사(1973~1975)에 참가했다. 이 기간은 구석기 연구에 대한 학자의 갈 길을 깊게 생각하고 학문에 임했던 시기였다고 이 이사장은 회고한다.

1972년 7월 31일 그는 팔당댐 수몰지역 조사로 실시된 양평 양근리 청동기유적과 앙덕리 고인돌 발굴(1972.8.15.~25)에 참여했는데, 단 한 차례의 구제발굴 조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남겨준 조사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단 한 차례의 조사였지만, 수몰지역에 대한 구제발굴과 사후조저방법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 조사였어요. 당시 팔당댐 수몰지역 조사로 발굴한 양덕리 고인돌을 그대로 이전 복워한 것도 손보기 교수였는데, 이러한 조처도 나에겐 큰 가르침이 됐습니다.”

연세대 박물관에서의 많은 경험은 그에게 구석기 연구(학문)와 박물관인으로서 평생을 걸어가게 만든 동력이 됐다. 그가 오늘날 세계적인 선사시대 연구자로 알려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에겐‘박물관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깊이 새겨져 있다. 1970년 9월의 일이다. 천주교회사를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게 인연이 된 그가‘절두산 기념관 전시’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절두산 기념관 관장은 박희봉 신부였다. 기념관을 찾아가봤더니 소장된 유물 외에 진열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약 3개월에 걸쳐 연세대 박물관에서 퇴근하면서 당시 학생으로 있던 박희현·박영철 등과 함께 밤늦은 시간까지, 어떤 때는 밤새 절두산에서 진열에 매진해‘순교자 유물 특별전’(1970.9.1.~9.30)을 열 수 있었다.

이 전시회 개막식에는 당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하던 김수환 대주교도 참석해 이융조 이사장 일행을 치하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당시 한국천구교회사연구소 소장이었던 오기선 신부, 류홍열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KBS TV의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에 출연해‘순교자 유물 특별전’등의 의미를 전국민에게 알림으로써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박물관 전시가 국민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좋은 경험이었다. “묘하더라고요. 기분이. 이 전시로 천구교회사 연구를 포기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얼마쯤 달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쯤에서 그가 참여했던 주요 유적조사를 알아보자. 그는 자신의 구석기 연구 인생을 3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1기는 연세대 박물관 시절, 제2기는 충북대 시절, 제3기는 충북대에서 퇴임한 이후 집중한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시절이다. 물론 이 마지막 3기는 지금도 현쟁진행형이다. 제1기 유족조사로는 공주 석장리, 제천 점말 용굴, 청주 두루봉을 꼽을 수 있다. 청주 두루봉은 그가 충북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그의 발굴 2기 신호탄이 된다. 두루봉 2차 발굴(1977년) 이후 이 동굴연구로 그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1984년). 제2기에는 청주 샘골, 단양 수양개, 단양 구낭굴, 순천 곡천, 석장리 11차, 일산 가와지, 화성 고주리, 청주 소로리 등이 눈에 띈다. 제3기는 양평 도곡리, 청주 만수리, 단양구낭굴, 안성 개정리, 제천 고명동, 그리고 다시 단양 구낭굴과 수양개로 이어진다.

국토와 산하 어디든 그에겐 유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금강·남한강유역의 구석기유적을 비롯한 선사유적 51개 유적을 조사·발굴해 국내·외 학계에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정과 집중력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융조 교수의 연세대 박물관부터 가와지 볍씨 박물관까지 50년 재직 기념호’라는 부제를 단 학회지 <박물관학보> 제29호(한국박물관학회, 2015.12)는 그의 공적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일제사의 식민지사관을 극복해 우리나라 역사의 상한을 단군시대(신석기시대)에서부터, 단군 이전의 시대(구석기시대)로 올려놓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구석기문화의 큰 체계를 비로소 세우는 데 기여했음. 특히, 청원의 두루봉 동굴·소로리유적·만수리유적·노산리유적 등과 단양의 수양개유적·구낭굴유적 등 동굴유적과 한데(야외)유적에서 큰 발굴성과를 올려, ‘중원문화권’의 정립에 큰 틀을 제공했음.”

   

일본 메이지대 개교 123주년 기념 특별전의 주인공이 된 단양 수양개유적 포스터.

그렇게 온 나라를 뒤지고 발굴하고 다닌 그이지만, 그가 가장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했던 학생들이다. 이 부분은 어쩌면 그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수양개유적은 충주댐 수몰지역 문화유적조사로 충북대 박물관팀이 1980년 7월 21일에 처음 찾았던 곳이죠. 이 유적의 조사와 전개 과정은 저의 학문세계 전부를 만들어 줬다고 할 수 있어요.”충주댐이 건설될 무렵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활동을 벌일 때의 일화를 전할 때, 그의 눈가는 다시 촉촉해졌고, 잠깐잠깐 목이 메이는 모습이었다.단양 수양개 1차 발굴 조사를 위해 답사를 나갔을 때 일이다. 7월 20일부터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남한강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그는 내심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허기에 지친 학생들이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강을 건너 수몰 예정 지역인 수양개로 앞장섰다. 비에 쫄딱 젖은 학생들은 나루터 저 멀리 움직이는 배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배를 부르는 학생들의 목도 모두 잠겼다. 급류 속에서 배를 움직이던 노인 분이‘이런 날씨에 강을 건너는 건 미친 짓’이라고 역성을 냈지만, 학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해서 강을 건넜지만, 다섯 끼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빵이나 달걀로 겨우 허기를 채운 학생들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지금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는 우종윤 원장이 당시 학생대표였는데, 그를 불러 나루터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다음날 주변을 돌아보니 고추밭, 마늘밭, 감자밭 곳곳에서‘까만돌’이 보였다. 가만 보니 모두 석기였다. 그렇게 수집한 석기들을 나무로 된 사과궤짝에 담아 왔다. 수양개 선사 유적은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일생을 살면서 그때 처음 학생들과 조그만 약속을 했어요. 무사하게 강을 건넌다면 분명 학생들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말이죠. 그게 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진 동력이었어요. 그런데 수양개 답사에 따라나섰던 학생들은 발굴 조사에는 결국 참여하지 못했어요. 같이 답사 갔던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뒤에야 조사가 진행됐으니까요. 그래서 수양개 유적 발굴지에 박물관을 건립한 뒤, 입구 복도 오석에 함께 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어요. 그날의 학생들이 없었다면, 수양개 발굴은 어려웠을 겁니다.”

이융조 이사장이 박물관 건립에 매진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자극은 외부에서 왔다. 당시 <조선일보>는 발굴 현장에 기자를 보내진 않았지만, 조금 다른 기사와 사설을 냈다. 교육관을 지어 구석기 문화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교육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날의 사설이 하나의 지침이 됐던 거죠.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그렇게 해서 그의 손길로 세상에 나온 박물관이‘중부고속도로 유적기념관’, 단양 수양개선사박물관, 충주 조동리선사박물관이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과 구석기 연구 작업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수양개 발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자연 조건에서부터 인위적 조건까지 그에겐 하나하나가 헤쳐 나아가야 하는 가시덤불 같은 것이었다. 1986년 중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유적조사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충청북도를 관통하는 중부고속도로 건설이 발표되자 수몰지역 조사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이융조 이사장이 충북대 박물관을 거느리고 한국도로공사를 방문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물관장이었던 이 이사장으로서는 당연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도로공사측에서는“지금까지 9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했지만, 이렇게 조사를 진행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관련 조사를 단칼에 거절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물러설 그가 아니다. 그는 『충북 유적·유물 지명표』(충북대박물관 조사보고서 제15책, 이웅조·차용걸·하문식·김석훈, 1985)를 제시하면서, “고속도로 건설로 여기에 소개된 유적이 하나라도 파괴된다면 그 모든 책임은 도로공사가 져야 합니다”라고 따지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충북의 곳곳에서 선사시대 유적 유물을 발굴했던 학자적 시각에서 제안한 내용이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이 책자에 소개된 충북의 유적은 모두 1천820곳이었다. 굴삭기와 불도저를 동원해서 땅을 마구잡이로 땅을 팔 일이 아니었다. 1주일 후 도로공사에서 연락이 왔다. 협의를 거쳐 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12개의 유적을 발굴하게 됐다. 이에 따른 전시관을 중부고속도로 개통에 앞서 개관할 수 있었다.

멈추지 않는 열정과 학문적 신념

열정은 박물관 건립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 나아가 유적을 기념하는 국제회의를 조직하는데까지 나아갔다. 1996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국제학술회의‘수양개와 그 이웃들(Suyangge and Her Neighbors)’이 그것이다. 오는 7월 26일부터 엿새 동안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제21회 학술대회가 열린다. 그는 국제학술대회 포스터를 보여줬다. 포스터에는 큼지막하게 한글로‘수양개와 그 이웃들: 수양개와 헬갭’이라고 표기돼 있었고, 그 아래 영어 표기가 붙어 있었다. 그가 설계하고 만든‘수양개와 그 이웃들’국제학술회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양개와 그 이웃들 국제학술회의와 함께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고마운 부분이 있다.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개교 123주년 특별전이다. 이 특별전은‘한국의 수양개유적과 일본의 구석기시대’라는 주제로 2004년 4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일본 메이지대에서 열렸다.

일본 메이지대는 일본의 첫 구석기유적인 이와 주쿠유적을 발굴해 구석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 조사를 통해 일본 전국의 구석기조사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메이지대가 일본 구석기연구의 중심에서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때는 일본 구석기학자의 60% 이상이 바로 메이지대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융조 이사장은 일찍부터 메이지대의 암비루 마사오 교수를 비롯한 동문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암비루 교수는 충북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가운데 특히 수양개에서 출토된 석기의 양상이 일본 석기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학자였다. 그런 암비루 교수와 김정배 고려대 교수의 도움에 힘입어 2004년에 메이지대가 개교 123년 기념으로 건립한 신축건물에 박물관 이전기념 특별전을 개최했던 것이다.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이융조 이사장이 발굴한 수양개유적을 비롯 소로리 유적이 한데유적 출토유물과 두루봉·구낭굴에서 출토된 뼈유물 등이 특별전의 초대 손님이 될 수 있었다.“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한 대학 박물관이 발굴한 구석기시대의 유물로 특별전을 개최했다는 것에 저는 무한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으며, 깊은 감회에 빠지게 됩니다.”

발굴 현장을 누벼온 그에게는 학생들 말고도 평생 감사해야할 이들이 또 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던 아내(안정식 여사)와, 학생들의 답사 발굴 지원을 허락해준 동료 교수들이다. 안정식 여사는 연세대 절친의 누이동생으로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발굴이란게 딱 정해진 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고양 가와지볍씨 발굴 때도 예정 기한보다 9일을 더 초과했어요. 발굴 예산이란 게 뻔한데, 어디가서 손을 내밀 수도 없죠.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뒤에서 도와주는 손길이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에요. 또한 동료 교수님들의 이해가 없었다면, 유적 발굴 조사는 어려웠을 겁니다. 학생들이 현장으로 빠져나가면 그 긴 휴강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죠. 그런데도 묵묵히 도움을 주셨죠.”

연구실보다 현장에서 땅을 파고 흙을 퍼다 나르기 바빴던 그였지만, 학회 활동과 박물관진흥법 추진 등에서도 의미 있는 결실을 거뒀다. 1970년대부터 친구 관계로 지내온 김정배(고려대), 문명대(동국대), 최무장(건국대), 강인구(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그는 고대사·고고학·미술사·인류학·신화학 등 다양한 분야가 참여하는 학회를 구상했다. 그 결실로 한국고대학회(1990)가 탄생했고, 한국박물관학회(1998), 호서고고학회(1998), 한국구석기학회(1999) 등도 만들어졌다. 학회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학자는 초심이 중요합니다. 큰 학자가 되라는 홍이섭 선생님의 말씀, ‘세계적 학자가 되라’는 용재 백낙준 총장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한 방향 인생길을 달려온 것이죠. 왜 유혹이 없었겠어요?(웃음) 그렇지만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약속대로 초심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준 학생들, 동료 교수님들께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구석기 시대를 비롯 선사시대는 여전히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낯선 영역이다. 사학과도 기피하는 요즘 세태에 고고학이나 고고미술사학이라니! 그렇지만 이융조 이사장이 걸어온 길을 보면, 이 분야의 의미와 매력은 그 어떤 학문이나 영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는 고고학 분야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성실, 끈기, 노력을 주문했다.


최익현 기자 bukhak@daenam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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