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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경험의 위기와 무기력의 비밀
대학교육을 생각한다
2016년 08월 04일 (목) 15:11:29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ditor@daenamu.kr

   
▲ 이연도 서평위원
날이 뜨거워서인지 만사가 귀찮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차가운 겨울의 고충은 기억나지 않고, 얼음장이 주는 서늘함만 그립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도 그렇지만, 올해는 예년에 비해 유난히 일이 많은 느낌이다. 원로 교수님과 선배 교수님들껜 죄송스럽지만,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해라 그런지 이런저런 상념이 적지 않다.

전해 내려오는 ‘아홉수’의 고비가 허튼 소리는 아니어서 학교나 주변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줄줄이 터진다. 나만 이런가 싶어 주변 선배께 여쭤봤더니, 당신도 그 나이에 비슷한 일들을 겪었다고 한다. 공자가 이 나이를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신 이유를 알 만 하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삶과 나이』(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년)에서 성년에 겪게 되는 문제를 ‘한계 경험의 위기’라 이름 붙였다. 예전에 지녔던 여유와 힘, 내가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자리에 한계 감정만 깊어가는 시기라는 얘기다.

피로감이 일상화되고, 이제 쉬고 싶다는 마음만 계속 든다. 지금까지 삶을 규정해 왔던 진지하고 결연한 책임 의식은 희미해지고, 모든 일이 심드렁해진다.

“일한다는 것, 싸운다는 것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듯 싶다. 사람들의 처신과 갈등이 눈에 보이고, 기쁨이 어떻게 생겨났다가 스러져 버리는지 깨닫는다. 삶의 비루함이 점차 명확해지고,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게서 환멸을 맛본다. 무대 뒤편이 들여다보이고, 세상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보잘 것 없다.” 과르디니의 서술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삶이 주는 깊은 실망이 내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환멸은 모든 삶에서 일어난다.

교양 수업을 주로 맡다 보니, 학생들의 변화가 쉽게 눈에 띈다. 학교마다 반드시 이수해야 할 교양과목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1학년에 편성돼 있다. 대학 1학년생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가는 플랫폼에 있는 셈이어서, ‘고4’라는 명칭에 딱 맞는 행동과 수업 태도를 보인다. 수업 배정을 하다보면, 선생님들이 1학년보다 고학년들을 선호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최근 몇 년 새 이런 수업 패턴이 바뀌었다.

주로 복학하거나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듣는 대학전체 반 수업이 예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학생들이 도통 수업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푹 가라앉은 분위기는 최근 우리 사회 ‘삼포’세대의 모습을 실감하게 만든다. 세상을 웬만큼 산 사람들이 무언가 포기해 본 경험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성년기에 겪는 한계경험의 위기를 앞당겨 체험하는 모습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교육환경에 가장 큰 문제는 ‘ADHD’증후군이었는데, 이제 그 자리를 ‘무기력’이 대체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강의실까지 ‘무기력’은 한국 교육을 상징하는 모습이 되고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김현수 서남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무기력의 비밀』(에듀니티, 2016)에서 우리 아이들이 무기력하게 된 원인으로 ‘자기정체성 부재’를 얘기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 남이 정한 표준에 자신을 맞추려 했다 포기를 경험하게 된 아이들이 택한 방어기제가 ‘무기력’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상담 과정에서 만났던 한 아이의 말이 인상적이다.

“학교가, 집이 무슨 기업이에요? 툭하면 자르겠다, 안 해주겠다, 나가라, 나오지 마라……. 마음에 안 들면, 시키는 대로 안하면, 성적을 못 올리면 관두라 하고…….”

중학교나 고등학교보단 낫겠지만,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능력과 성과라는 기준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현 시스템에서 소외되고 상처받기는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상대평가 시스템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학점으로 학생을 줄 세우는 학교. 헝거 게임처럼 랭킹이 작동하고, 한번 도태된 사람은 복귀할 수 없는 잔인한 사회에서 공감과 우정을 얘기하긴 어렵다.

교수들에게도 온갖 잡다한 인증과 평가 제도로 경쟁을 유도하고 있는 상황이니,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건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실험에서 확인하듯, 대학의 개혁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해 온 교육부에 이제 교수나 학생들도 체념한 듯 보인다. 각자도생이 사회의 주류 풍경이 됐으니, ‘무기력’은 한동안 우리 사회가 벗어나기 어려운 현상이 될 듯싶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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