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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외교'라는 평가 너머에 있는 역사적 진실은?
시대를 담은 책 이야기 _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오항녕 지음|너머북스|2012.9)
2012년 10월 26일 (금) 22:02:00 최익현 기자 bukhak@daenamu.kr

조선 사회와 인민들은 광해군 15년 동안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이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갔다.
그 15년을 잃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가 드디어 1천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영화야 허구 즉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니 영화 속 스토리를 굳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이 어떤 인물인지,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더듬어보는 일은 전혀 성질이 다른 작업이다. 과연 광해군은 억울한 반정(反正)의 피해자일까. 그는 영화에서처럼‘백성’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군주였을까. 그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중립적 외교정책’을 제대로 진행하기나 했을까.

이와 관련 오항녕 전주대 교수(역사문화학과)가 최근 펴낸『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이하‘거울’)이 영화적 호기심을 넘어 역사적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좋은 안내자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근대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역사학계를 향한 저자의 비판이 잘 담겨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사실 오 교수는 지난 2010년에『조선의 힘』(역사비평가)을 상재한 바 있다. ‘500년 이상 지속했던 조선문명의 저력을 찾는 글들’로 구성된 책이다. 조선 문치주의의 핵심인‘경연’을 비롯,『 조선왕조실록』, 대동법, 성리학, 역사를 보는 관점에 관한 문제제기 등을 담은 매우 논쟁적인 내용이었다. 오 교수는 바로 이 책에 새 책『거울』과 관련된「부활하는 광해군」을 독립된 내용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돌아왔다.

   
▲ 영화「광해,왕이 된 남자」가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역사를 콘텐츠로 한 이영화의 성공이 '광해군'에 대한 흥미를 새롭게 불러일으켰다. 과연 광해군은 어떤 임금이었을까. 역사학자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사진 제공 퍼스트룩>
 

누가 광해군을‘재발견’했나?

「부활하는 광해군」이‘광해군’이란 인물을 바라는 역사학적 시각의 스펙트럼을 분석한 글이라면, 『거울』은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전면적으로, 다양한 사료 상의 문제점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좀 더 구체화한 내용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1623년 인조반정(계해반정) 이후 광해군은 혼군(昏君), 즉 판단이 흐려진 임금, 어리석은 임금으로 불렸다. 이런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조선 시대 내내 이어졌고, 당색(黨色)과 상관없이 공통되는 평가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때는 언제일까?”그리고 답한다. “의외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지만 광해군의 평가가 달라진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조선사편수회의 간사로 활동했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종전과 달리 광해군의 정치를 중립외교라고 높이 평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후 남한의 교과서『고등학교 국사』, 북한의『조선전사 9』는 물론, 비판적 성향이거나 보수적 성향이거나를 막론하고 광해군에 대한 20, 21세기의 평가는 거의 비슷하다. 아마 이렇게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놓고 평가가 일치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1933년 일본인 이나바는 광해군을‘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澤民] 군주’라고 평했다. 이는 광해군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이전 평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예컨대 1921년 일제가 편찬한 국사 보충교재를 보면,“ 광해군은 무도(無道)하여 폐하여지고, 왕의 조카가 대신 올랐다”라고 서술돼 있다. 이러한 평가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관점과 차이가 없는 시각이었다. 이나바는 1619년(광해군 11) 심하(深河) 전투(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후금에 패한 전투) 이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부활하는 만주와 조선[滿鮮] 관계’라고 반기며, 광해군의 폐위를 비극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식민사학자 이나바의 이런‘광해군 재발견’해석은 이후 경성제대에서 일본 관변학자들에게 실증주의 역사학을 배운 역사학자 이병도에게로 이어졌다. 실용주의, 중립외교라는 평가 기조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됐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역사 서술도 이와 같은 기조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광해군=중립외교’라는 공식이 국사 교육을 통해 심어지게 됐다. 이런 시각은 최근까지 이어졌는데,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지난 2000년『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역사비평사)를 출간,“ 안으로는 민족 화해를 위한 대승적인 아량이, 밖으로는 열강을 구슬릴 수 있는 외교적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 같은 지혜를 키우고 능력을 기르려 할 때 역사로서의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분명 소중한 거울이 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광해를‘소중한 역사의 거울’로 보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거울』의 저자 오항녕 교수의 역사 분석과 대립되는 점이기도 하다.

20세기 한국 역사학계의 광해군 평가

오 교수가 보기에‘21세기에도 광해군은 건재하다.’무엇이 이런 토대를 만들어낸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근대 역사학의 근대주의’다. 그는 근대주의를“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근대가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로 설정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주의 역사학이‘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사 연구를 안내했다. 그 결과는? 조선사회가 오랫동안 낡은 사회 시스템에 머물렀다는 정체(停滯)를 전제하는‘식민지근대화론’이든, 주체성을 강조하는 ‘내재적 발전론’이든 둘 다 유럽의 근대모델(근대주의)에 갇혀 자기 역사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 실제 역사에서 어떤 일이, 왜,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지, 그 과정은 어떤 것인지 등을 짚어내지 않고, 추상화된 이론의 틀로 자기 역사를 이해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들여다본다면, 20세기에 광해군이 되살아난 배경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면, 근대주의자들이 지닌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때문에‘인조반정’이후 300년 동안 조선 인민들과 조선사회는 어떤 낙인이 찍혀버리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상황을 극복할 능력도, 낡은 성리학적 질서와 시스템을 혁신할 능력도 없는 존재들, 그래서 결국은 남의 지배를 받아도 되는 민족이라는 낙인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의 지난 역사를 이렇게 허술하게 이해하게 된 데는 자신과 같은 역사학자들의 책임 방기에 있다고 반성문을 제출한다.『 거울』이,‘ 역사의 거울’이 될 수 없는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깊게 응시하려는 한 중진 사학자의‘반성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 교수는『광해군일기』를 기본 자료로 충실히 읽어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西人. 반정의 주체가 되는 당파로, 이들이 광해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이 편찬했으므로 믿을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두고 그는‘타당하지만 과도하다’고 본다. ‘누가 편찬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에 대한 비생산적 선입견을 만연시켜 모든 사료(=과거의 경험)을 부정하게만들지만,‘ 어떤이유로믿을수없다’는 주장은 비판적 사고를 증대시켜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한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광해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북인 세력이 편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록 자체의 성격도 중요한데, 『광해군일기』의 기본 사료는 반정 이후 편찬할 때 작성한 것이 아니라, 광해군 재위 당시 기록된 사관의 사초,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관청끼리 주고받은 문서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는‘실록’전문가인 오 교수의 특기가 발휘된 부분이기도 하다.

실록전문가의 평가와 문제의식

같은 사료를 바탕으로 접근했는데도 역사 해석이 이렇게 다르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는 이 문제까지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다. “실록이 풍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좋은 기록임에는 분명하지만 기록자, 평론자의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당연히 사료 비판이 돼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그런 사료 비판이 전무하다. 그러므로『광해군일기』만이 아니라 실록에 대한 사료 비판은 학계에서 앞으로 해야 할 과제, 그동안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는 과제다.”

그렇다면, 과연 오 교수가 본 광해는 어떻게‘위험한 거울’이 되는 것일까. 그는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과 욕망, 사건들의 우연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에 주목해서 광해군을 기존의 평가와 다르게‘재평가’한다.

민생과 재정의 안정, 건강한 정치, 풍요로운 문화의 창출,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능동적 대처 등 너무도 절박하고 중요했던 시기를 광해군은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윤리적 파탄과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행정적 과오, 임진왜란 이후 기울어진 국력을 새롭게 일으켜야 하는 일을 국가 중심에 놓지 않는 실책을 범했다. 대동법조차 측근들의 이권욕 때문에 시행이 흐지부지해졌다. 또한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을 반영한 문치주의를 무시했으며, 중립외교도 실제로 들여다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명나라에 파병된 조선군사 1만3천여 명 가운데 9천명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됐다. 왕은 군정(軍政)과 군비를 정비해야 했음에도 말한 내세웠을 뿐, 실제로는‘궁궐 공사’에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반정의 명분은 쌓여갔고, 민심은 차츰 새로운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간 중립외교라는‘치적’에 광해군 평가에 집중 돼 있었다면, 저자는 이렇게 광해군 15년 세월을‘잃어버린 15년’으로 이해했다.그래서 이 책은 비판이 아니라 반면교사를 제대로 하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 왜 하필 그때 그랬을까? 조선 사회와 인민들은 광해군 15년 동안의 시간을‘잃어버렸다.’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이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갔다. 그 15년을 잃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 인조반정 이후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 무너진 사회의 기강을 세워 그래도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했으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어야 했다.” 덧붙이는 말. 영화 속에 그려진‘사라진 15일의 기록’은 허구다. 즉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란 뜻이다. 또 하나.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는 언제 죽었을까? 그는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그 곳에서 천수(天壽)를 누렸다. 틈틈이 시를 썼는데, 한양에 있을 때를 그리워하는 내용도 더러 있었다. 1641년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 임금 가운데 네 번째로 장수한 인물이다.

저자인 오항녕 전주대 교수는 고려대에서 조선시대 사관제도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 역사기록과 성리학 등 사상가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최익현 기자 bukhak@daenam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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