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야. 그날 헤어진 뒤 잘 지내고 있겠지?
창밖으로 이어지는 길고 지루한 장맛비를 바라보다 문득, 지난 해 여름 한 날이 떠올랐다. 글을 쓰고 싶어 했던 너에게 고3 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어봤을 때, 돌아온 너의 대답은 의외였다. ‘가득 채워 넣으면 위험한 여백’이라고 너는 대답했으니까. 나는 지금도 그때 너의 대답이 퍼즐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K야. 대학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고 있는 지금, 너는 어떤 시간 위에 서 있는지 묻고 싶다.

이미 가고 싶은 학과를 마음속에 굳게 결정했던 너의 진로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 선택이 경영학과나 회계학과, 또는 영어영문학과와는 다른 어떤 인생의 지점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너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선택은 한편으로는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國語’를 가르치는 나는 너의 그런 선택에 달리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러니 묻고 싶구나, K야. 네가 선택한 한 학기 생활이 어떠했는지.

지난 4월 대학 중간고사를 마치고 네가 찾아왔을 때, 사실 나는 그때 너에게 저 질문을 하고 싶었다. 무슨 대단한 확인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너의 입에서 어떤 확고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때 너에게 그 질문을 하지 못했던 것은 스스로 선택한 학과였고, 공부였는데도 네가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현대소설론만 재미있었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 때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무거워졌지. 목구멍을 넘어가는 아이스커피가 마치 쓴 소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너에게 달리 어떤 말을 해주지 못했다. 물론, 나도 네가 나에게서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안다.

문학시간이면 그 깊은 눈을 더욱 반짝이던 K야. 올해 나는 고3 반을 벗어나서 고1 반에서 머리보다 몸이 커져가는 녀석들과 씨름하고 있다. 너처럼 글을 쓰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아직 없다.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허전하다. 가끔 떠들썩한 아이들의 목소리들 속에서 네 목소리가 들여오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다. 문학을 왜 하냐고 언젠가 너는 물었다. 빵 하나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문학에 왜들 그리 목숨 거냐고. 책읽기의 행복을 말하던 김현의 문학론을 들려준 건 그때였을 게다.

그렇다. 문학은 빵을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직접적인 구원도, 현실의 아픈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한다. 내가 ‘김현’을 빌려서 너에게 대답했던 내용을 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학은 ‘불편함’을 환기해준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한당 같은 세계의 불편을 끊임없이 문제 삼고, 삶을 바로 보게 한다고 말했던 것을 너는 기억할 것이다. 그건 너도 동의하지 않았더냐. 이 세계가 장밋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 아픔이 더 많은 지상의 방 한 칸이라는 것.    

그날 저녁 너는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그래도 생각보다 할만 해요.” 스스로 선택한 학과고, 대학이지만 너는 내심 두려움이 밀려온다고 고백했다. 글쎄, 두려움 없는 삶이 있기나 할까. 나도 두렵고 또 두렵다. 맑은 너희들 눈망울 앞에서, 도대체 너희들의 미래와 운명을 어디로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생각에 놀라게 된다.

K야. 그러나 지금은 그 두려움에 멈춰 설 때가 아닌 것 같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이 장편소설 『정글만리』를 최근에 출간한 건 알고 있겠지?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내가 해득할 수 있는 역사, 내가 처한 사회와 상황, 그리고 그 속의 삶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서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이라는 구절에 오래 눈이 갔다. 너와 나 모두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다. 한정된 시간을 사는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이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게 과제일 것이다.

너의 선택은 너의 증명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부디 한 학기 네가 겪은 대학 생활로 대학 전체를 예단하지 말고, 꾸준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네 옆에 있는 벗들과 나아가길 바란다. 그날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너의 모습이 푸른 반딧불이가 돼 지금 내 기억 속을 날고 있다. 어둠이나 두려움도 자세히 응시하면 곧 익숙해지고, 그 속에 가야할 길이 보인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동섭 수원 창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