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오빠 같다’는 말이 꼭 맞다. 흰 남방 윗단추를 풀어헤치고 나타난 그에겐 나이 서른다섯의 흥행작 감독이라기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풋풋함이 있었다. 진지한 영화 포스터에 잔뜩 긴장하고 영화관에 들어선 관객에게 ‘인공호흡이야, 키스야!’라는 대사로 너스레를 떨 줄 아는 이 남자. 「풍산개」의 청년감독 전재홍을 만났다.
“돈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겠지만 열정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단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과연 단돈 2억으로 발 디딜 틈 없다던 상업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진 용자(勇者)다웠다.
미국서 자라 성악, 경영학을 전공하고 스물아홉에 영화에 도전, 서른다섯에 ‘풍산개’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까지. 늦깎이 문하생이었던 그를 이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기덕 감독 「빈집」이 인생의 터닝포인트

“성악을 시작할 땐 ‘이게 내 인생의 전부야!’라고 생각했죠. 근데 그걸 놓으니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 거예요. 너무 신기했어요. 그게 저한텐 영화였습니다.” 그에게 ‘왜 하필 영화감독이었느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리면서 감독이 되는 꿈을 꿨었어요. 근데 그땐 하나의 꿈같은 직업이었죠. 스물아홉에 이제는 꿈만 꾸지 말고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더라고요.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정말 오래 걸린 것 같아요. 29년이 걸린 거죠.”
열아홉도 아닌, 말 그대로 내일모레 서른인 그를 돌려세운 건 김기덕 감독의 「빈집」이라는 영화였다. 그 영화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빈집」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연출, 비주얼, 미장센까지. 완벽한 영화. 한국에 이런 감독이 있다니! 찾아가야지!” 마침 깐느 영화제에 김 감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사비를 털어 무작정 프랑스로 날아갔다. 그리고 김 감독의 “한국 들어오면 연락해”라는 한마디에 그는 짐을 쌌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영화인생’이 시작됐다!
다른 영화인들보다 시작은 조금 늦었지만, 영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지만 그가 지금까지 성악이나 경영을 공부했던 토대가 큰 도움이 됐다. 아니, 오히려 늦게 시작했기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많이 보고, 또 많이 찍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일 년에 단편영화 15작품 정도를 찍었다. 그리고 4년간의 경영학 공부는 그에게 ‘경영인’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했다고 전한다. 그는 “감독은 기업 CEO와 비슷해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데려와서 기획하고, 생산하고, 출시하고, 또 판매하죠. 2억이란 저예산으로 만들더라도 시장에서 뒤지지 않는 제품을 만들어야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며 감독이 갖춰야 할 핵심역량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꼽았다.
그래서 그가 촬영장에 갈 때 항상 챙기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선글라스. 한번은 촬영 중 뉴욕에 있는 집에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화를 접고 뉴욕에 들어갈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수십 명의 스태프가 어른거려 갈 수 없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오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눈은 벌게져 있고,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현장인데.” 재빨리 선글라스를 꺼냈다. “감독은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고 있거든요. 제가 찡그리면 다 찡그리고 불안해해요. 자기의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자리에 내비치면 안 되죠. 나를 믿는 스태프들, 또 기다려주는 관객들의 신뢰를 져버릴 수 없으니까.”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들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그래도 그는 침착하게 스스로를 단련했다. 명문대 학생들, 특히 돈 많은 집 자녀들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공식처럼 굳어진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영화라고 예외이겠느냐만 그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하지만 힘은 들죠. 북극을 가고 싶은데, 산타클로스를 생각하고, 새하얀 북극곰이 콜라는 마시면서 오로라를 보고, 난쟁이들이 샘물을 만드는 그런 생각으로 북극에 가면 얼어 죽겠죠. 북극에는 무시무시한 북극곰들과,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극에 갈래? 그럼, 각오하고 가야죠.”
영화가 나오기 전 3년 동안 작품 활동을 못했다.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항상 일이 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몇몇 스타 감독이 있긴 하지만 여긴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오는 곳은 아니에요. 자기만족을 위해 시작해야 하죠.” 그는 영화를 찍기 위해 웨딩촬영 ‘알바’를 했다. 물론 지금도 종종 한다. “사람들은 비굴하다고 하지만, 영화를 찍기 위해 돈 버는 거예요. 제가 뭘 하는 사람인지만 잊지 않으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그는 해주고픈 말이 있다. “실패하는 걸 즐기라”는. “‘실패’는 그것을 주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것이에요. 기회는 언제든지 있고,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되니까 좌절할 필요 없잖아요. 중요한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에요. ‘상처가 많은 과일이 달콤하다’는 말을 저는 믿어요.”

'나이에 맞는 감독' 되고 싶어

이번 영화가 막을 내린 뒤 찾아올 시간들을 잘 안다. “영화가 막을 내리면 실업자가 되겠죠. 전쟁이 시작되는 거죠. (웃음). 그래서 전 영화가 잘된다고 으쓱하지 않아요. 다음 제품을 출시해야 하니까.”
올 상반기 한국영화 개봉 편수, 71편. 한 달 평균 십여 개의 작품이 영화관에 걸리고 제작환경도 녹록치 않다는데, 그 속에서도 그는 ‘가능성’이라는 꽃을 피웠다. 이제 막 감독으로서 유명인 반열에 오른 그에게도 꿈은 있다. ‘나이에 맞는 감독’이 되는 것. 30대에 맞는 작품을 하기 위해 다음 영화는 액션을 생각하고 있다. 비오는 날 오후 카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카페를 나서는 길이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난 것만 같았다.
인터뷰를 마친 이튿날 신도림역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헤드셋을 목에 걸고 수화기 너머로 수다를 떨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것도 자기영화를. 개봉 이후 극장에서 자기영화를 본 적이 없단다. 이 남자가 젊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의 눈 속엔 꿈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