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쩌면 우연히 찾아온다. 스티브 잡스는 13살에 컴퓨터와 사랑에 빠졌고 안철수는 의대를 다니다 27살에야 백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많은 청소년들이 어쩔 수 없이(?) 꿈을 정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0살이다.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이때 대학 진학을 위해 학과와 미래를 정한다. 그러나 꼭 그런 학생들만 있는 건 아니다. 노원청소년자활지원관에서 만난 3명의‘늦깎이 소녀들’의 경우도 그렇다. 조금 다른 ‘타이밍’으로 사는 이들은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윤가을(21세), 곽미현(22세), 김영은(22세) 씨를 불쑥 찾아가 말을 건넸다.

실내 장식 소품을 만들며 웃고 있는 윤가을, 곽미현, 김영은씨(왼쪽부터)      사진제공=최성욱기자

“사실 20살이 되도록 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어요.”올해 인덕대학 새내기가 된 영은 씨는 원래 요리사가 꿈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졸업하자마자 식당에서 일했는데 보수가 적고 너무 힘들어 얼마 안 가 그만뒀다. 가정 형편 때문에 일을 쉴 수가 없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카페에서 1년을 일했지만 역시 맞지 않아 그만뒀다. 그러다 지난해 8월에 노원청소년자활지원관에 오게 됐다.

“여기서 많이 도움 받았죠. 일하는 법도 배우고, 선생님들이 힘든 일 있으면 상담도 해 주시고….”영은 씨는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사회복지학을 전공할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는데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신이 생겼어요.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마음을 먹은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덕대학에 수시원서를 넣었고 다행히 합격했다. “안 되면 내년에 다시 도전해 보려는 마음으로 지원했는데 운 좋게 됐어요.”

대학을 가게 된 데는 자신과 같은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도 크게 작용했다. 돈 때문에 대학 진학을 고민하기도 한 영은 씨는“돈 때문에 망설이는 친구들은 무작정 진학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라고 조언한다. 합격하기만 하면 돈은 어떻게든 생기기도 한다는 것. 영은 씨도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벌써 3월 말인데 새내기 생활은 어떻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잡은 공부가 적응이 잘 안 된다며“열심히 해야 하는데… 잘 안 되네요”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한 영은 씨와 달리 가을, 미현 씨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진로를 찾는 중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크(!)한 가을 씨는“괜히 진학했다 학비만 날릴 것 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야무야 대학을 못 갔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대학 갔다고 교수님이니, 과제니,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할 때는 가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어정쩡한 나이만 아니라면 가면 좋겠죠. 살면서 꿈이 몇 번이나 바뀔 건데, 다 경험해 보고 새로운 친구도 만나고, 어쨌든 배우는 거니까 좋지 않을까요.”

그녀는 성격상 어디 얽매이는 게 싫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간호사 실습 활동을 하다가 엄격한 규율이 싫어“때려치우고”다른 직업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왕이면 관심 있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되고 싶단다.

한참동안 친구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미현 씨도 입을 연다.“ 뭘 하든 내가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게 되겠죠.”대학은 천천히 고민해보고 있다. “그냥 가야 되니까, 뭐라도해야 하니까”해서 진학하는 건 아무래도 부정적이다. 그녀의 현재 목표는 고등학교 전공인 컴퓨터 능력을 살려 웹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대다수 고등학생의 시간 리듬을 무작정 쫓아가지 않는 그들은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그러나 언니로서, 누나로서 지금 고등학생한테 주고 싶은 조언은 저마다 다르다. 영은 씨는“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보면 자기가 느껴지는 게 있겠죠”라고 하니 가을 씨가 곧바로 반대를 선언한다. “일단 목표를 정하고 시간을 잘 짜야 해요. 하고 싶은 게 딱히 없어도 뭐라도 해야 돼요. 돈을 벌던가, 학원을 다니던가…. 할 시간에는 해 내고, 놀 시간엔 놀고.”미현 씨는 신중하다. “시간이 흐르기 전에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일단 꿈을 정해야죠. 그래야 조금이라도 보이니까. 꿈 없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미래는 불투명하고 현실은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조금 느리게 보일지라도 직접 부딪혀가며 스스로의 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진로 교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직접 직업세계에 뛰어들기도 하고, 천천히 혼자 생각해보기도 하면서. 늦은 만큼 성숙한 세 사람이지만, 웃음만은 여느 소녀들처럼 생기발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