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문에서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은 적이 있어. 엄마지만 '김 여사'로 애칭되기에, '고 3인 딸에게 고단을 덜어 주는 편지를 써줄 수 있을까?' 하고 되물은 적이 있어. 김 여사라 불리울만큼 이기적이고 마음만 앞서는 편지지만, 딸 써 볼게.

네가 태어났을 때 아주 작은 손발을 보며 더럭 겁이 났었지.

18개월 차에 고열로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온갖 검사를 받느라 애간장이 타기도 했고, 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씩씩한 어린이로 자랄 거예요'라는  다짐을 하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목욕탕에서 동생과 뛰어다니며 장난하다 미끄러져 턱을 다치고 대성통곡하여 무척 놀라기도 했고. 하하.

그렇게 작은 아기가 지금은 고3이 됐네.

2011년을 보내는 마지막 날에 네가 들려 준 새해 바람이 생각난다. "아빠는 팩을 해 조금 젊어지셨으면 좋겠어요. 김 여사는  운동을 하여 뱃살 조금 빼고요." 동생에게 컴퓨터 조금만 하길 바라는 너의 새해 바람은 아침 일찍 등교해 늦게 귀가하니 가족에게 무심할 거란 예상을 뒤집었어.

아빠는 너의 바람을 지키는 것이 정말 쉬운 줄 알았나 봐. 쉽게 대답했지만, 1년이 지난 후에 여전히 거친 피부로 딸에게 핀잔을 듣게 됐지. 딸이 늦게 귀가해 확인을 못했지만, 아빠는 지난 한해 성실하게 마사지 받으셨어.

첫 딸은 살림 밑천이고 든든한 친구가 돼 준다는 옛말이 어쩜 이리 꼭 맞는지.

고2 겨울 방학 중에 있었던 일이야. 일요일 새벽 1시쯤 '닥터 후'  영국 드라마를  보려는 네 바람을 아빠는 단칼에 거절했고, 너는 "아빠도 수험생 이었던 때를 떠올려 주세요. 일주일에 딱 한번 보려는데 어찌하여 반대를 하세요?"라 주장했지.

아빠는 "일요일이자 월요일 새벽인 시간에 시청을 하면 월요일 오전에 피곤하니, 엄마에게 녹화해 달라고 부탁해 쉬는 날 봐라"라며 두 부녀는 팽팽히 맞섰지. 거짓말 조금 보태어 30분 정도 눈싸움도 했던 것으로 기억해. 그날 딸은 '닥터 후'를 보았고, 결국 잠을 못 자고 말았지. 

1주일 후 일요일 밤에 "텔레비전 안 볼 거예요. 아빠도 일찍 쉬세요"라고 선언했고, 아빠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단다. 밤늦은 시간에 '극한에서 살아남기'란 프로를 열심히 시청했기 때문이란다. 딸이 부모의 도움을 당당히 요구했지만 딸 만큼 결단은 못한 것 같아. 너그럽게 넘겨줘서 고마웠어.

이번 7월 모의고사를 보고나서 너는 집에 들어오며 점수 이야기를 하더구나. "난 괜찮아요"라고 네가 말했을 때, 엄마는 크게 한 숨 소리 냈지. 딸에게 낮은 점수라 여기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내색했어.

저녁 내 오답 정리를 하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많이 미안한지.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날 치른 시험이었는데…

엄마는 정말 '김 여사'답게 행동했었어. 그런데 너는 정말 잘 참아 주더라. 고마워 강희야!

딸!  이제 100일 남짓한 입시 준비 시간이 남았구나. 오롯이 혼자 헤쳐 나가야할 텐데.

100일 동안 가뭄이 들면 땅의 먼지가 풀썩일 정도지. 이때에 하늘이 내려주는 비만큼 네가 입시의 압박감과 부담감이 풀썩이는 고3 생활을 견디어 주니 고맙고 대견하단다. 한 여름 땡볕 아래서 영그는 포도알처럼 고단한 문제풀이 양을 채워가고 수능의 알곡 만들어가는  너에게 응원 많이 할게.

알곡이 꽉 찰수록 고개를 숙이듯 우리 딸 마지막까지 웃음 짓고 마음을 지켜 남은 시간 달려보자. 지금 이 시간은 아마도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 날엔가 네가 어른이 됐을 때, 후회도 미련도 없는 시간으로 기억될 거라고 믿어.

하나 더, 지금 어렵게 맞이하는 이 순간들, 그리고 과정들로부터 아름다운 네가 무엇인가를 더 배우고, 많이 생각해서 삶의 방향을 그려내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너는 길이 없는 곳에서, 너만의 작은 길 하나를 온 몸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틀림없이 멋지게 해낼 거야.

너의 2미터 뒤에서 박수를 보내는 엄마가

김미연 / 경기 수원· 고 3 학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