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구름 뒤에 숨은 틈에 해바라기는 금방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날, 해바라기는 더이상 꽃이 아니었다. 누구의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 영롱히 빛나는. 태양을 쏘는 꿈 그 자체였다. 해바라기가 핀 마을에서 ‘고3’을 만났다. 8월 초의 정오만큼이나 뜨거운 가슴을 지닌 아이들. 고3들의 역경은 강원도 산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일과 속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은 해바라기와 똑닮아 있었다.  사진은 도계고 교정에 핀 해바라기  ⓒ 최성욱

■ 방과후교실 마지막 날 만난 ‘고3의 꿈’

지난 9일 오후 1시,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역사(驛舍)엔 산들바람이 휘이 하고 스며들었다. 8월의 폭염이 절정에 치달을 무렵, 도계역 인근 등나무 그늘엔 마실나온 마을 어른들로 북적였다. 도계의 명소 긴잎느티나무를 끼고 돌자 도계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친 곳. 도계고는 산자락의 작은 마을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방과후교실 마지막 날이었다.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경쾌하다. 수학능력시험까지 ‘D-91일’. 이곳엔 어떤 학생들이 어떻게 ‘고3’을 이겨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슬기와 은미는 3학년 1반, 2반의 실장이다. 영기는 전교 부회장, 수환이는 학예부장을 맡고 있다. 촉망받는 도계고의 얼굴들이다. 이들은 모두 부모님 혹은 그 이전부터 도계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물론 이 친구들도 도계에서 나고 자랐다. ‘산골소년’ 혹은 ‘탄광촌 아이들’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어서 싫을 법도 한데 내색은커녕 밝기만 하다.

“무슨 말씀하시는 거에요. 요즘 같은 매스미디어 시대에!”

언론인을 꿈꾸는 수환이는 기자의 시대착오적인 ‘촌놈드립’을 뉴미디어론으로 맞받아쳤다. 산골에 살아도 TV나 인터넷, 심지어 아이패드까지 활용해가며 대학입시를 준비한단다. 영기는 아이패드로 인터넷 강의를 듣지만, 슬기는 공부에 방해될까봐 일부러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멧돼지가 나타났다는 은미의 에피소드 정도만이 산골마을임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도계는 한때 아주 번성했던 탄광촌 중 하나지만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이런 탓에 ‘탄광촌의 아이’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수환이의 집안만 석탄 관련 일을 했다. 수환이의 할아버지는 한때 도계에서 연탄공장을 운영했고 아버지는 대한석탄공사를 다니고 있다.

산골이지만 산골이 아니고, 탄광촌이지만 탄광촌의 아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현장의 기록. 낭패다. 기자는 힘을 빼기로 했다. ‘산골을 배경으로 자란 아이들의 고3나기’다. 그러나 이들 네 친구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고3을 지내오며 다듬은 대학과 꿈에 대한 철학은 산골만큼이나 순수하고 깊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왼쪽부터 함영기, 이은미, 현수환, 김슬기 학생(강원 도계고 3학년) ⓒ 최성욱

슬기는 때 묻지 않은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사는 아이다. 대학입시를 비롯,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롭지만 따뜻한 감성을 녹여낼 줄 안다. 대학에 대한 소신도 뚜렷하다. ‘대학 간판’에 연연한 세태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진학할 대학은 정하지 않았고 국어교육과나 국문과에 가려고 한다. 슬기의 꿈이 세계를 다니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국제봉사활동가이기 때문이다. 도계를 떠나 전국 혹은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어를 전파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영기의 꿈은 국어교사다. 학생들에게 공부 말고도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단다. 늘 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일을 가슴에 품고 있다. 농구를 잘해서 상도 탔다. 내친김에 학교에 체육부도 만들고 부회장도 맡았다. 일찌감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목표로 잡았다. 이번 입시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을 지원한다. 성적 향상 능력과 리더십을 자기 무기로 삼고 있다. 걱정은 많아도 특유의 함박웃음이 슬기 못지않다.

은미는 여섯 살부터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면서 자랐다. 몸이 아프다는 게 어떤 뜻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사는 게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줄곧 반장을 지냈다. 남 앞에 나서고 돋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궂은일을 도맡아서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내신 성적이 그리 좋지 않은 은미는 봉사활동 경험을 모아 사회복지 관련 학과의 입학사정관 전형에 지원할 계획이다.

수환이는 ‘탄광촌 아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광부는 아니지만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수환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았으면 했다. 수환이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스노우 보드를 탔다. 국가대표 꿈나무까지 지낸 실력자(!)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경제적 벽에 부딪혀 꿈을 접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방송기자라는 새로운 꿈이 찾아들었다. 평소에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기자가 참 잘 어울릴 것 같다.

사회 수능까지 90일도 안 남았다. 막바지 수능 준비, 어떻게 하고 있나?

슬기 아침 7시에 일어나서 8시까지 학교에 와요. EBS 문제집을 풀다가 친구들이 오면 가벼운 수다로 긴장을 풀어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PMP로 EBS 강의를 봐요.

영기 저도 아침 7시에 일어나는데 수업 10분 전에 등교해요. 아침에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푹 빠져서 수업에 집중을 잘 못하는 편이에요. 아침엔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죠.

수환 내신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논술전형에 집중하고 있어요. 논술 기출문제를 풀어보고요. 학교에 국어 선생님이 네 분이 계시는데 첨삭요청 드려서 피드백을 받죠. 수능 막바지라 자신있는 언어와 외국어 위주로 공부하고 취약한 수학 같은 과목은 아는 문제는 틀리지 않는다는 전략으로 시간을 안배해요.

은미 입학사정관 전형을 대비해서 자기소개서 등 준비할 서류들을 수정·보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활동경력’을 기술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여러 가지 활동 보다는 2~3가지를 꼽아서 진정성 있게 담아내려고 해요.

사회 고3들에게 대학은 ‘꿈의 공장’과 같다. 그래서 대학입시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나.
 
영기 중학교 때부터 제 목표는 교사였어요. 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사범대를 들어가려면 성적이 좋아야 하는데 1학년 성적이 나빠서 걱정이에요. 그치만 학년별 성적 향상능력으로 제 잠재력을 보여줄 거에요. 1학년 때는 실장을 했고, 2학년 때는 체육부 동아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전교 부회장을 맡고 있죠. 성적도 꾸준히 올렸어요. 참, 제가 한 농구 하거든요. 시 대회에 나가서 우승도 했어요. 교사는 아이들을 이끄는 직업이니 학교에서는 실장·부회장을 맡았고, 밖으로는 농구팀을 꾸려 우승도 했으니 리더십에 잠재력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슬기 국어교사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저는 한국어 선생님 하고 싶어요. 1학년 때 몽골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몽골 울란바토르 부속 초등학교 학생들이 하나같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거에요. 교장선생님이 한국인인데,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대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졌어요. 원래 전 구호활동가를 하고 싶었는데, 국어도 좋아하니까 한국어 선생님 하면서 구호활동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간호사처럼 취업 잘 되는 쪽으로 원하셔서 국어선생님이 되기로 합의(?)한 거지만….

수환 저는 기자가 될 거예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스노우 보드 국가대표 꿈나무를 했는데 집안에 경제적인 부담이 컸고, 학교 전학문제까지 얽혀서 관둬야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운동을 했는데 갑자기 공부하려고 보니 처음엔 잘 안됐어요. TV에 나오는 종군기자나 재해 전문기자들, 멋지지 않아요? 그런데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갖게 해준 건 사실 소설 『도가니』였어요. 범죄자들과 결탁해서 왜곡보도하는 기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죠. 지금은 그래요. 나는 안 그럴 거다! 그런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중앙대, 경희대,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할 겁니다.

은미 여섯 살 때쯤이었나,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아픔을 알다보니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고 싶어요. 실제로 아주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도 자처하고, 청소년 장학센터에서 청소년위원회 활동하면서 노인봉사나 어린이 교육봉사 등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꼭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봉사하는 일에 경영자가 되고 싶어요. 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 거에요. 강원대, 국민대, 농협대학 경영학과를 지원하려고 해요.

사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도계는 많이 변해있을 것 같다.

ⓒ 최성욱

수환 도계는 탄광 말고도 뮤지컬이나 유리공예 마을로도 유명해요. 언론에 기고를 한다든지, 내 매체에 기획기사를 담아낸다든지, 지역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많을 거라고 봐요. 탄광이 문을 닫으면 주민들이 다른 일을 해야 할 거잖아요. 그리고 도계로 돌아와서 저 같은 탄광촌 아이들을 도울 거에요. 저도 그렇지만, 이곳 아이들은 대체로 ‘우물 안 개구리’에요. 세상을 향해 더 넓은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딜가든 나와 내 옆사람이 협력을 해서 자신감 있게 하면 못 해낼 게 없다는 자신감!

은미 저도 성공하면 도계로 돌아올 거에요. 이곳은 탄광촌이라 놀이시설이 거의 없어요. 저는 지역사람들을 위해서 문화센터 같은 놀이공간을 만들 거예요.

끝으로 <대나무>의 공식질문 ‘대학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던졌다. 제3세계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는 슬기는 ‘약속을 이뤄주는 문’이라고 대답했다. 후원 아동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영기도 ‘꿈으로 한 발짝 내딛게 하는 꽃’이라는 비슷한 대답을 내놨다. 수환이는 꿈을 펼칠 수 있는 큰 ‘도화지’, 은미는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어주는 ‘열쇠’라고 말했다.

꿈이 그저 꿈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꾸미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들의 순수한 진정성이 빛 발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힘찬 꿈의 날개짓이 시작됐다.

(삼척) 글·사진 최성욱 기자 cheetah@daenamu.kr 

■ 도계고는

도계고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앞산 중턱에 탄광이 보인다.  ⓒ 최성욱

강원도 삼척시에 자리한 도계읍은 세 갈래길의 가운데에 있다 해서 길가말(도변촌, 道邊村)이라고 부르다 현대에 와서 ‘도계’로 이름지어졌다. 1960년대 석탄산업이 부흥기를 달렸던 ‘탄광촌’이다.

1967년 도계실업고등학교로 문을 연 도계고(교장 김창규)는 일반계 9학급(185명), 전문계 6학급(63명), 특수학급 1반(5명) 등 전교생 249명의 소규모 고등학교다. 전문계는 인터넷통신과와 컴퓨터전자과를 두고 있다. 3학년은 일반계 3학급에 64명, 인터넷통신과와 컴퓨터전자과에 1학급씩 각각 11명, 9명이다. 교원은 총 37명(남 28명, 여 9명)이다.

산간벽지에 위치해 있지만 4년제 대학 진학 비율이 높은 편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진학자의 62.8%가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이들 중 절반이 넘는 55.1%가 강원대, 관동대, 한림대 등 도내 대학으로 진학했다. 다음으로 경상권(20.4%) 진학비율이 높았다. 서강대, 국민대 등 서울권 대학(14.3%)도 상당수 보냈다.

최근 도계고는 학력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영어카페, IEP, 진로·진학상담 활동을 강화했다. 2010년부터 실천적 인성교육을 모토로 창작 뮤지컬 ‘뺀지와 철조망’을 공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