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행동 하지 않는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는 신의 노래라는 뜻으로 인도의 복음서다. 간디가 스스로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전문을 끊지 않고 읽었다고 알려진다. 간디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행동 뒤에 사욕적인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미리 생각한 결과는 적당한 시기에 가면 틀림없이 올 것이다.”

‘스펙경쟁’이 치열한 입시풍토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입시경쟁에서 우리는 자칫 본질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여기, ‘동기가 행동을 결정해온’ 자유로운 영혼들의 이야기가 있다.

윤이나, 고은별, 신재연(왼쪽부터). 지난해 입학사정관 전형에 합격한 세 친구는 화려한 수상경력조차 든든한 집안배경 덕일 거라는 편견이 속상하다. 실제로는 자기 분야만큼은 부모도 못말리는 고집쟁이들이다. 사진 : 최성욱 기자

지적장애를 가진 쌍둥이 사촌언니들과 한집에서 자란 윤이나(가톨릭대 인문학부·1)는 차이와 차별의 한 끗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책장에서 풍기는 책향기를 유달리 좋아했다는 이나는 작가가 가꾸는 글밭에서 이 한 끗의 괴리가 상쇄된다고 믿고 있다.

이나가 글밭에 삶의 목표를 씨앗삼아 심은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소록도에서 한센병에 걸린 할머니들을 만난 것도 이즈음. 이나는 평생을 격리된 채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글밭으로 옮겨와 지역신문사로부터 청소년 문학상을 받았다. 고교 졸업 때까지 받은 크고 작은 문학상이 30개다. 고교시절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암 선고. 맏이로, 아버지의 지난한 투병생활을 함께 이겨내면서 이나의 글밭에는 희망의 가치도 영글었다.

정지용 문학의 뿌리를 찾아 헤매다 가톨릭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이나는 “이젠 내가 한 걸음씩 가는 것 같다”며 신명나게 새밭을 일구고 있다. 산문이나 수필의 글밭 한켠에 신문기사와 작사글 같은 작은 텃밭이 생긴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고교 수업시간, 선생님이 불쑥 질문을 던진다. 일순간 잦아든 침묵을 깨뜨린 건 너무나 간단한 한마디 “STOP!” 모두 멈추면 된다는 말에 신재연(한양대 건설환경공학과·1)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멈추는 것 말고 대안은 전혀 없는 건가요?” 초등학교부터 과학자를 꿈꿔왔던 재연을 충격에서 건져올린 대답은 ‘지속가능한개발’이었다.

환경을 해치지 않는 토목시설물을 개발하는 연구원이 되고픈 일념으로 고교생활을 보냈다. 6개월에 걸친 댐·수질환경조사, 강화도 일대 퇴적환경연구 등은 고교시절의 작은 업적이다. 영재학급 선발시험을 비롯해 과학대제전, 교내 과학전 등 각종 과학대회에서 받은 상장이 일일이 세어보지 못했을 만큼 수북하다. 그러나 재연도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손가락이 잘리는 큰 사고를 당하면서 깊은 슬럼프에 빠져든 경험이 있다.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사는 게 의욕이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고교 입학 즈음 재연을 구해낸 건 또다시 과학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힘이다. 지난 2007년 겨울, 서해를 검게 물들였던 원유유출사고가 터졌을 때 재연은 만리포를 찾았다. “2천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인간띠가 바다의 검은띠를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곳은 절망보다 희망이 가득찬 곳이었다.”

굴곡진 삶의 여정 속에서 재연이 얻은 것은 적극적인 삶의 자세다. “중학교 3년, 환경을 핑계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 내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뀐다는 사실을 몰랐다. 지금은 의욕 없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고은별(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1)은 초등학교 6학년 이후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보고서 제출 시기에 학급에서 공용으로 쓸 풀과 가위를 구비하거나 숙제 알림장을 쓰는 게 그의 주된 공약이었다면 어떤가. “소소한 일상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도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하는 그다. 학급야영을 기획하고, 몸이 아픈 친구를 위해 아침엔 샌드위치, 오후엔 참고서를 파는 바자회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물품만 정리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꿈은 국제기구 직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직원이 돼 강대국의 기술원조로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다.

은별은 어려운 집안형편에도 포기하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글로벌리더 프로젝트 등을 통해 국제경험을 익혔다. 모의유엔이나 모의WHO도 큰 자산이 됐다고 한다. 호주를 다녀올 기회는 있었지만 사실상 영어는 독학했다. 팝송을 듣거나 한글자막을 지우고 영화보기를 반복했다.

지금도 국제기구 직원이 되려는 꿈이 확고하다. 확고한 의지는 계획을 구체화시키기 마련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은별은 영어와 중국어 실력을 키우고 국제지역대학원에 진학할 마음을 먹었다. 국제기구 한 길을 바라보고 달려온 은별이는 “남들처럼 여유있게 살지는 못해도 대신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이들 셋은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품은 꿈을 일관되게 지켜왔고, 늘 어떤 ‘행동’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지난해 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전형에 합격했다. 올해 대학입시의 화두는 ‘스펙보다 스토리’에 맞춰지는 모양새다. 이번엔 입시를 위해 인생을 쥐어짤 텐가. “남들보다 못한다고 낙담하지 마라. 얼른 다른 분야를 찾아가면 된다.” 이들은 오늘 만남을 또 한 장의 이야기로 기록할 것이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