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초등학교가 최종학위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기술을 배워 공장장이 되라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장에 취업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정말로 공장장이 됐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그들의 푸른 젊음을 발산할 때, 또래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그는 해병대 하사관으로 지원해 5년을 복무했다. 제대 후 종교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무작정 프랑스로 떠났던 3년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학위가 없어도, 꿈과 열정만 있으면 동등하게 평가받는 세상이 있음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영화란 꿈을 발견한 그는 시나리오 쓰기에 도전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박철수 감독의 도움으로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하지만 비주류, 초등학교 졸업 감독이란 수식어는 항상 그를 따라다녔으며 결국 충무로의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고 평단의 무시를 받는다. 지난 9월 「피에타」로 제69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 이야기다. 대학 졸업장은 고사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이라고는 하나도 갖추지 않은 사람,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해병대에 지원한다. 가부장적 집안· 공장 그리고 기독교 수직적 명령체계와 복종이 관철되는 사회, 해병대에서 김기덕은 군대 체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열심히 군생활을 했다. 많은 포상을 받았고, 후임들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선임이기도 했다. 직업군인이 될 수도 있었던 해병대 하사관으로 5년의 복무를 뒤로하고 제대한 김기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한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신학을 공부한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김기덕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종교적 고민을 오랫동안 했고, 이름도 없는 야간 학교지만 신학을 1년 정도 공부했습니다.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돼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내 스스로의 인격이 의심스러워서 그만뒀어요.”

김기덕 감독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이탈리아의 평론가 안드레아 벨라비타는 “기독교와의 소통은 그의 지식과 정신적 성장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이것은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힘든 인생의 경험이 정신적 차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습니다”라고 분석했다. 가정에서도, 군대에서도, 교회에서도 김기덕 감독은 평안함을 찾지 못했다.

백남준을 보며 자신감을 얻다

“제대 후에 다시 공장 일을 하기 싫었어요. 학위가 없으니 회사에 원서도 못 냈죠. 거리에서 화가 흉내 내며 그림을 그리는데, 내 미래에는 아무것도 없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더라고요. 그때 백남준 선생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많이 배우지 않고도 세계 예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백남준을 알게 되며 자신감을 얻었다. 백남준처럼 자기 자신을 모두 던져버리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서른의 나이에 무작정 프랑스로 떠났다. 왜 프랑스였을까? 당시 김기덕 감독에게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이자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무작정 떠난 파리에서 자존감 회복

그는 파리에서 주린 배를 바게뜨로 채우며 무작정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아침에 거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 아랍의 집시들이 김기덕 감독의 모델들이었다. 김 감독은 당시 그들의 처절한 삶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은 동질감 때문에 더욱 그들을 집착해 그렸다.

「피에타」의 한 장면

김 감독이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전문적인 화가들과 비교해서는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그는 한인화가들이 모여 살고 있는 남프랑스 몽펠리에로 내려가 6개월간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당시 김기덕 감독은 이집, 저집을 떠돌며 동가식서가숙했다. 한인화가들의 아틀리에를 돌아다니고, 함께 낚시를 다니며 친해졌기에 어깨 너머로 그림에 대한 지식도 배우게 된다. 김 감독은 날씨가 좋을 때면 구시가지 한 복판 코메디 광장에서 초상화를 그려 꽤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초상화 벌이가 시원찮을 때면, 로봇 춤을 춰 관광객들의 시선을 뺐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동양인이 로봇 춤을 추는 것을 보며 박장대소했고, 김기덕은 여기서 에너지를 얻어 유럽일주를 시작한다. 여러 나라를 돌며 도시의 광장에서 전시회도 벌이고, 초상화도 그리며 힘들었던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게 됐고, 더 넓은 세상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으로 보낸 3년은 후에 영화감독이 되는 데 큰 자양분이 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 감독은 스스로도 “프랑스에 가기 전까지는 철저히 저를 무시했어요. 학교도 안 나왔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프랑스에 가서 바뀌었습니다. 학위, 혈연, 지연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있음을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이죠.”

영화판 동지들이 생기다

1993년 귀국한 김 감독은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 도전한다. 그러나 글을 써본 적이 없는 그가 입상할 리는 만무했다. 프랑스에서의 자신감에 오기까지 더해져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기초반에 등록하고 체계적인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때 김 감독을 이끌어 줬던 사람이 「학생부군신위」, 「301·302」 등을 찍었던 박철수 감독이다.

박 감독은 “맞춤법도 서툴렀고 영화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지만, 뭔가 가능성이 보였기에 문창과 학생들을 옆에 붙여줬어요. 완전 기초부터 닦기 시작한 거죠”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김 감독은 결국 대상으로 수료식을 마치고 데뷔작 「악어」의 시나리오를 쓴다. 꿈을 찾아 가는 길에, 박철수 감독 같은 이끌어 주는 손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아시스」 , 「시」 등으로 유명한 이창동 감독도 김기덕 감독을 동생처럼 아끼며 그의 영화들을 지지해 준다. 한국 영화평론계의 독보적 존재인 정성일 평론가 역시 김기덕 감독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이다. 이런 지지는 그의 꿈이었던 영화 인생을 이어가는 데 매우 큰 힘이 됐다. ‘초등학교 졸업 감독’ 편견의 벽을 넘다 그렇다고 김 감독의 영화 인생이 귀국 이후 순탄하게 풀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김 감독은 충무로에서 비제도권 감독으로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 김기덕 감독이 지난 9월 제6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는 장면

결국 김 감독은 3일 만에 이 발언을 취소한다는 사과기자회견을 한다. 이렇듯 김 감독에 대한 사회의 편견의 벽은 높았다. 정성일 평론가는 저서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에서 “김기덕의 삶은 완전히 오해받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영화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매우 특별한 삶 때문이다. 여전히 모두가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중학교를 마친 다음 학업을 그만두는 것은 여전히 특별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거의 미친 듯한 학벌사회이기 때문이다”라고 학위맹신에 빠진 한국사회를 비판했다.

세계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 최고 영예의 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오늘, 누구도 김 감독을 초등학교 졸업 감독이라고 수군거리지 않는다. 김 감독은 더 이상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음 영화로 관객과의 소통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학위가 인생의 목표인양, 특목고에 진학하고, SKY에 들어가고, 유학을 가서 석사, 박사과정까지 해오고도 진정 자기가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들이 있다. 부모의 기대, 주변의 기대 속에 자신의 진정한 꿈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한 경우다. 그 꿈을 고민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 김 감독이 얼룩졌던 과거를 헤치고 꿈을 향해 묵묵히 정진했을 때, 학위는 그저 종이 한 장이었고, 세상은 그를 알아봤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daenamu.kr